컬러와 동영상의 시대인 21세기에 단색조 정통수묵화는 오히려 현대인에게 쉼을 가져다준다. 복잡한 도심의 만화경에서 잠시 벗어나 물과 숲, 나무 그늘 아래서 바람에 몸을 맡길 때와 같이.
현대 생활을 이루는 많은 조건들이 마치 인스턴트 음식처럼 달고 짜고 자극적이다. 매일 매일의 삶이 그렇고 인생의 큰 조망으로 보아도 도식화되어있다.
특히 성공지향의 가치관이 범람하는 현시점에서는 더 화려할수록 더 가치 있고, 더 주도면밀할수록 선진적으로 여겨진다. 공기청정기에 의지해 숨쉬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 된 지금 무공해 산들바람 같은 어떤 것과 조우하기를 기대한다면 사치일까? 사치로 여겨지는 것을 지향하기에 미술을 고급문화라고 한다면 그도 맞는 이야기일 것 같다. 그러나 정신없는 쳇바퀴에서 잠시 시선을 돌려 눈과 마음을 쉬게 해주는 것. 숨을 고르고 자신을 놓아주는 것이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를 가져다주지는 않을지라도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은경이 추구하고 있는 수묵화의 가치가 선명하게 읽혀진다.
이은경의 수묵화는 초기에 비교적 장중한 맛을 지닌 것이었다. 발묵(먹물을 한지에 흘리거나 뿌려서 번지게 하는 기법)과 강한 먹선을 강조한 작품들은 비장미를 선사했었다. 이번 전시작도 화사함이나 가벼움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데 작가의 고유한 특성에서 기인한다. 사람의 성격을 말할 때 ‘선이 굵다’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이은경의 작품세계도 선이 굵고 무게가 있는 편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특성을 기초로 하여 이번 작품들은 담백하면서도 원숙한 필치를 보여준다. 꾸미지 않아도 아름다운 자연 미인처럼 어떤 한 요소를 굳이 강조하지 않고도 작품이 되게 하는 힘은 원숙함과 자신감에서 비롯된다. 도대체 독특한 조형미를 가진 대상이 될 수 없을 것 같은 한가한 텃밭, 낮은 지붕과 공터, 풍성한 나뭇잎마저 다 떨어진 바싹 마른 나무들이 주인공이 되었다.
소박한 들꽃과 덩굴에 마을 방문객을 맞이하는 꽃이라 이름붙이고(응문지화應門之花), 심심함 그 자체를 작품으로 끌어들인다(심심深心). 겉으로는 아무 표정 없으나 속 깊은 정을 발견하는(무색유심無色有心) 것은 덩그마니 공터에 뿌리박은 나무 한 그루를 보는 작가의 시선이다. 심심(深心)은 묘리와 선도를 구하는 마음이란 뜻을 가진 단어이면서도 일상어로 쓰이면 무자극의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건강한 줄기가 베어져 나간 채 이제 밑동만이 흔적을 증언하는 밭뙈기를 지나간 붓자국은 무심함 속에 숨긴 작가의 치열함을 증언한다.
맨 밥을 거듭 씹을 때 느껴지는 오묘한 단맛은 인스턴트 음식의 자극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알 수 없는 맛이다. 그러나 그 심심한 맛이 주는 쾌감은 무언가를 보채지 않고도 넉넉하게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만나는 기쁨과 상통한다. 자연과 가장 가까운 상태이기도 하고 남이나 스스로에게 해를 끼칠 수 없는 맑은 순간으로 볼 수도 있다.
수묵화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많은 것들 중 가장 중요한 가치가 이것이다. 동양의 전통이 현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근본 가치도 이것이다. 심심한 가운데 고양되는 정신의 가치와 존재의 은은한 향기. 이은경의 수묵화를 통하여 공기청정기보다 더 맑고 순수한 바람(風)을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